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캥거루 날씨

나와 제이와 제니의 이야기 두번째

by Radhaa 2021. 3. 2.

비치로드를 걸으면서 제니가 얘기했다.

옛날에 어린 동생 둘을 바다에 잃었다고, 그래서 이렇게 시간이 지난 지금도 파도만 보면 마음이 미칠것 같다고.

나는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조용히 듣기만 했다.

내가 그렇게 폰디체리를 떠나고 한국에 돌아오고 나서도 제니는 자주 우리집으로 전화를 했다.

어느 날 제니에게 전화가 와서는 우영아 나 니 꿈을 꿨어. 그러길래 와 무슨 꿈이요? 했더니,

너가 말이야, 한국음식을 잔뜩 싸가지구 폰디체리를 왔더라구 하면서 깔깔 웃는거다.

한국으로 돌아올때마다 언제 또 인도를 가게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신기하게 제니가 저렇게 내 꿈을 꿨다고 하면 몇 달 후엔 난 이런 저런 핑계를 대어 인도에 가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몇 번이나 폰디체리에서 제니와 제이를 만났다. 만날 때마다 제니는 조금씩 달랐다.

묘하게 불안해보이는 날이 종종 있었다.내가 주변에서 듣는 이야기도 이상했다.

동네 사랑방 같은 바에 갔다가 아주 귀여운 프랑스 청년들을 만났는데, 걔네들이 나보고 넌 여기에 왜 왔어? 라고 물었다.

나 여기 친구들이 있어. 제이랑 제니라구 어쩌면 너네들도 알지 모르겠네! 했더니 걔네들이 그러는거다.

제이랑 제니가 니 친구라고?

어! 너네들도 알아? 했더니,

그 중 한 명이 나에게 가졌던 모든 흥미가 싹 사라졌다는 듯한 웃음을 지으면서 말하길,

그 사람들 모르면 이 동네 사람 아니지 하는게 아닌가.

내가 전혀 모르겠단 얼굴로 왜? 냐고 물어보니, 이번엔 다른 애가 얘 진짜 뭘 모르네. 하는 표정으로

그 여자 미쳐서 돌아다니잖아 란다. 나로선 도대체 이해가 안되는 그런 이야기들을 다른 사람들에게서 몇 번이나 들었다.

데이비드도 그러는거다. '한 밤에 우리집에 찾아와서는 담배 한개피만 달라고 하더라니까'. 

사실 그러거나 말거나 별 관심도 없었다. 오히려 저 사람들은 왜 나한테 저런 얘기를 하지? 하는 마음만 들었다.

그래서 이런저런 얘기를 들었는데  혹시 그게 사실이냐고 제이제니에게 묻지도 않았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2011년쯤인가, 제니가 한국에 잠깐 온 적이 있었다. 그 때 제니에게 연락이 왔는데 정말 모든게 이상했다. 

만날 약속은 정했지만 대체로 두루뭉술해서 도대체 만날 수가 없었다.

그래놓고는 뜬금없이 전화를 해서는 너 어디니? 왜 안나왔어? 라고 하기를 반복하다 제이에게서 연락이 왔다.

도대체 어떻게 된거냐는 내 물음에 한숨을 푹 쉬더니, 조만간 만나자길래 약속을 정하고 드디어 제니와 제니를 만났다.

제니는 내가 알던 제니가 아니었다. 왜인지 몰라도 양쪽 종아리엔 두꺼운 붕대를 대충 둘둘 감아놨고, 

흥분해서 말을 하다가도, 갑자기 조는가 하면 느닷없이 제이에게 소리를 빽 지르는 등 극도의 폭력적인 성향을 보였다.

정상이 아니었다. 

제이가 제니의 정신과 약을 철저히 챙기는 건 알고 있었는데, 한국에 입국하자마자부터 한국인인 제니는 그야말로

물 만난 고기가 되서 관리가 안되는 모양이었다.

이 약이란게 처음 한 두번씩 빼먹기 시작하다 그 이후부턴 먹이는게 점점 더 어려워졌고,

그렇게 통제가 안되서 아예 안먹게 됐을 땐 실화탐사대에나 나올 법한 그런, 사연 있는 미친 사람이 되버리는 것이었다. 

폰디체리에서 사람들이 나한테 말한게 이런거였구나 싶었다. 

나한테는 평범한 모습만 보이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사람들이 말하는 정신줄을 붙잡는다는게 그런거였을까.

 

안좋은 상황에서 사람들이 좋았던 때를 얘기하는 것처럼 나도 말했다. 

언니, 언니 기억나요? 왜 나랑 만난지 얼마 안됐을 때 제이아저씨가 치과 치료 받고 있었잖아.

그때 그 치과 미션스트리트에 있었구, 한번은 언니랑 내가 몰래 제이보다 먼저 가서 치과에 들어오는 제이아저씨

놀래켜준적이 있었잖아요. 그때 제이 아저씨도 좋아했지만, 기다리던 다른 인도인 손님들이 더 재밌어했잖아. 

 

언니는  냉소적인건지 뭔지 모를 희미한 미소를 짓고 아 그거. 하더니 졸기 시작했다.

제이는 지쳐보였다. 폰디체리랑 라오스를 오며가며 지내던 제이에게 서울은 어려운 곳이었다.

내가 어떡해요 이제 하는 눈빛으로 쳐다보니, 제이가 오른손으로 턱을 쓸어내리면서 어깨를 으쓱하는 특유의 몸짓으로

자기도 모른다고 말한다. 그건 폰디체리에서 내가 쓸데없는 얘기를 하면, 얘 정말 노답이네 할 때나 보는 몸짓인 줄 알았는데.

제이는 유일하게 제니를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저렇게 덜렁 쓰는게 혹시나 그 의미를 가볍게 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 정도로 그랬다. 

 

한동안 말없이 있다가 헤어졌다.

이후에 제니는 상태가 더 안좋아져서 매일 우리집에 전화를 걸어댔다. 처음엔 하루에 한번, 나중엔 밤낮없이.

그리고는 악의에 가득 찬 미친 소리를 늘어놨다. 

이젠 제이가 도저히 통제가 안되는 제니의 눈치를 보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체력적으로도 도저히 제니를 이길 수 없었다. 결국 제이는 먼저 라오스로 들어가고 제니는 가족들의 도움을 받아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제니에게 걸려오는 전화가 줄어들고 목소리도 차분해졌다. 

다른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정신세계에 갇혀서 얼마나 힘들었을까. 

약으로 진정 시켜놓은 목소리를 듣는 것이 더 괴롭다.

그렇게 몇개월 후에 제니는 제이가 있는 라오스로 돌아갔다. 

 

이 사건은 모두에게 큰 상처가 되었다. 모두가 서먹해졌다.

제니에게서 전화가 오지 않아도 그려려니 하게 되었다. 

몇 년이 지나고 제니에게서 긴 메일이 왔다.

그 땐 정말 미안해, 내가 그땐 미쳤었어. 

이후로는 언니에게 종종 전화가 왔다. 카카오톡으로도 연락이 왔다.

이게 나이가 들어서인지 아니면 제니에게 더이상 감정적으로 의존 할 수 없다는걸 깨달아서 인지,

나는 이제 회사 다니는 것의 고단함이나, 소개팅에 나오는 남자마자 얼마나 별로인지에 대해서

구구절절 늘어놓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미쳐버린 언니 앞에서 좋았던 때를 얘기 하던 나처럼, 제니는 20대의 내가 좋아할 법한 얘기를 늘어놨다.

남자친구는 생겼니. 회사는 다닐만하니.

더 잘 말하고싶은데 말할게 없었다. 회사는 맨날 똑같고, 남자요? 얼마전에 소개팅 하나 했는데 별로였어요.

그러면 언니는 준비라도 한 듯한 오바스러운 말투로 대답을 했다.

어머 왠일이니 정말. 왜 남자들이 너 같은 여자를 몰라보는거야 진짜 웃긴다.

평범한 척, 보통사람 인척 하는 그 말투, 목소리. 

여기 사람들은 평범하지 않으려고 난리들인데, 4차원인 척에 열을 올리는데 제니는 그 반대였다.

그 목소리가 얼마나 사람 가슴 아프게 하는지 제니는 몰랐을거다.

 

 

+ 이게 제가 2017년에 첫 얘기를 썼더라구요. 

그러다가 이 후의 이야기에 대해선 엄두가 나지 않아 몇번을 쓰다 말고 쓰다 말고 했는데,

아주 최근(작년 12월쯤), 또 일이 하나 있었어요.

 

++ 그 일 이후에 너무 다양한 감정이 들어서 이젠 마무리를 지을 수 있겠다 싶어서요. 

 

+++ 제니의 가족분들은 제니에 대해서 아주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고 계셔서 다행이지요. 

 

++++ 이제 눈은 좀 지겨운데, 날이 좀 더 빨리 따듯해졌으며 좋겠네요. 건강하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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